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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글

아쿠오 2015. 3. 18. 08:01

 

우리 세대가 히말라야가 돼야 후세대가 에베레스트가 되지!
-김난도 서울대 교수의 서울대 입학식 축사를 읽고-
2015년 03월 11일 (수) 16:55:51 [조회수 : 762]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장) itspolitics@naver.com

 

김난도와 박노해

김난도 교수의 서울대 입학식 축사(2015.3.2)를 강추하는 사람이 있어서 읽어 봤다. 괜찮은 글이었다. 고교동기 모임 카톡에 퍼 날랐다. 그런데 글이 sns 여기저기서 계속 보였다. 공감, 강추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뭐가 그리 감동적인가 궁금해서 이번엔 정독을 했다. 그랬더니 감동적인 요소도 많았지만, 아쉬운 요소도 많이 보였다. 하지만 이 점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독한 소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1980년대 중반의 박노해 시를 읽은 느낌이었다. 한국 사회의 특정 측면(부조리)을 날카롭게, 감동적으로 찔렀고, 요지도 훌륭했지만, 근저에 흐르는 현실 인식은 ‘우리 시대의 치명적 혼미’로부터 그리 자유롭지 않아 보였다. 1980년대 박노해 시를 끌어다 붙이니 김난도 교수를 매우 폄하하는 인상을 주는 것 같은데, 그건 아니다. 대학교 입학식 축사로서는 역대 최고가 아닐까 한다. 청중이 신입생 임을 감안하면 나 보고 하라고 해도 김교수만큼 잘할 자신이 없다. 
 
내가 축사에 대해  비판적 시각으로 글을 쓰는 것은 서울대 신입생이 아니라, 이 글에 감동 받아 열심히 퍼 나르는 40~50대, 그것도 한국 정치와 사회에 대해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며 자주 목소리 높이는 사람들에게 치명적 부조리의 본질과 구조를 깨우쳐 주고 싶어서다. 김교수의 축사는 널리 읽히고, 대체로 감동 일색이기에, 비판적 시각이 일리만 있다면, 우리 시대의 혼미를 조금이라도 더 깰 수있지 않을까 해서다. 김교수와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유력 정치지도자의 언설을 소재로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진지하게 읽을 사람도, 감동받을 사람도 별로 없을 것 같아서 그것을 소재로 삼지 않았다.  
 
김교수 축사의 핵심 요지는 시공을 초월한 울림이 있다. 
 
"바다 위에서 혼자 높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나와 함께 가야 할 사회적 약자들과 우리 공동체를 함께 생각하는, 선하고 책임 있는 인재로 성장해야 합니다. 당신이 여기 앉아 있기 위해 탈락시킨 누군가를 생각하십시오. 당신은 승리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채무자입니다"
 
축사 전반은 일부 표현만 빼면, 미국이나 일본 대학교 입학식에서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이것이 이 축사의 빼어남이자, 큰 맹점이다. 사실 한국 사회의 치명적 부조리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도 감동적인 연설을 할 수도 있다. 그랬다면 내가 이런 긴 비판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지와 착각을 깨야 악마의 맷돌을 멈추게 한다
축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는, 김교수의 현실 진단 내지 인식은 우리 사회의 보편적이지만 치명적인 무지와 착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깨뜨리고 넘어서야, ‘1980년 서울의 봄을 짓밟은 군홧발’ 보다 훨씬 잔혹한, 청년/미래세대의 기회와 희망을 갈아 없애는 악마의 맷돌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5년이 걸릴지 50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이 역대급 축사가 시대의 부조리를 제대로 꿰뚫지 못한 얕은 진단과 대안을 멋진 표현으로 포장한 b급 축사로 느껴질 정도가 되어야, 김교수가 성토한 우리 사회의 치명적 부조리가 웬만큼 해소되지 않을까 한다.  지금 양대 정당이 주도하는 현실 정치에 대해서도, 어느 한편에 붙어서 열심히 응원하고 야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둘 다를—시스템 문제와 리더십 문제까지도  분별하여- 한없이 후지게 보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국 정치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듯이……. 사실 이쯤 되면 이승만, 박정희뿐만 아니라, 김대중, 노무현도 더 이상 숭배, 찬양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누가 보더라도 김교수의 축사는 a급 축사다. 시대의 한계라는 경계선까지 갔다. 이것만 넘어서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펼쳐지지 않을까 한다.  
 
감동의 이유
비판에 앞서서 이 '역대급 축사'를 뜯어 보면, 역시 감동을 주는 글의 요건을 잘 갖추고 있다. 첫째, 좀체 듣기 힘든 자기 반성(성찰)이 있다. 교수로서 너무 많은 기회를 가졌던 기성세대로서! 둘째, 세니오르 오블리주(senior oblige), 즉 나이 든 자의 책무(세대이기주의 비판)도 신선하다. 셋째, 한국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참신한 질타가 있다. 미생의 '사업놀이'에서 착안한 '놀이'시리즈 비판이 그것이다. 정파놀이, 규제놀이, 갑질놀이, 착취놀이, 논문놀이 말이다. 넷째, 넓은(글로벌한) 시각이 있다. 일본, 중국의 도전에 대한 생생한 얘기(경험, 정보)가 그것이다. 다섯째, '나 자신만의 이익이 아니라 함께 성장해 나가야 할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이타정신'도 강조했다. 에베레스트산과 히말라야 산맥의 관계에 대한 비유가 일품이다. 
 
글 곳곳에 부조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고정 관념을 깨는 반전이 있다. 아픔에 대한 따뜻한 공감도 있다. 특히 위에서 길게 소개한 글 마무리가 참 좋다. 
 
요지야 동서고금의 현인들이 했던 말씀의 한국 말 버전, 즉 희망을 잃지 마라. 야망을 가져라(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등), 열심히 공부하라. 안팎의 도전을 직시하라. 이웃과 사회적 약자와 당신이 탈락시킨 사람과 대학 공동체와 나라를 돌아보고 사랑하라 등이지만 그래도 때와 장소와 어울려 진한 감동이 있다. 비록 돌아서서 현실을 마주하면 남는 것이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대학교 신입생들에게는 이만한 감동이 어디인가? 
 
이 글 하나만으로도  김교수가 왜  힐링 전도사로 불리는 지 알 것 같다. 비록 치료는 못해도 잠깐이나마 청춘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진정시켜주니까! 뿐만 아니라 “아프면 환자지 왠 청춘이냐?” “아프니까 어쩌라고?” 등 비아냥거리는 글이나 책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도 알 것도 같다. 
 
아쉬운 이유
그런데 나는 김난도는 물론, 그 수많은 비아냥•비판자들까지, 즉 우리사회의 담론 주도층 대부분이 대한민국의 부조리 구조에 관한 한 치명적 무지와 착각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독특하고 복잡다단한 한국 사회를 깊고 넓게 분석, 종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선진국의 프레임이나 이론으로 한국 사회를 보려 하기 때문이다. 이 축사에도 그 편향이 뚜렷하다. 
 
예컨대 유사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가진 청년세대가 취직, 결혼, 주거 문제 등으로 고통을 당하는 원인에 대한 분석이 대표적이다. 김난도는 이렇게 얘기한다.
 
"이것은 시대적 변화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을 누릴 수 없게 됐습니다. 경제와 인구의 구조가 변화하면서 그 많았던 기회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다시피 저성장과 인구구조 변화(저출산 고령화)는 OECD 대부분의 나라에 공통된 현상이다. 청춘의 아픔도 동서고금에 공통된 현상이며, 저성장 시대에 들어 그 아픔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청춘들을 유달리 아프게 하는 것은 세계적 보편성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바로 이것이 김교수 얘기가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동시에 만만치 않은 아쉬움을 주는 이유이다.
 
세계적 보편성과 한국적 특수성
요컨대 대한민국의 부조리의 양상과 원인은 대부분의 문명국 혹은 선진국에도 공통된 것도 있고, 한국에만 있는 것도 있다. 전자는 세계적 보편성, 후자는 한국적 특수성으로 개념화 할 수 있는데, 지금 우리 지식사회는 외국어만 좀 되면(외국 물만 좀 먹으면) 대충 알 수 있는 세계적 보편성은  잘 아는 듯 한데, 이 못지않게 치열하게 공부해야 파악할 수 있는 한국적 특수성을 너무 모른다. 과거에는 우물안 개구리가 되어 세계가 어디로 가는지, 중국, 미국 등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너무 몰라서 문제였다면, 지금은 모든 문제를 세계적 보편성으로 환원하려고 해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 단적인 예가 ‘경제와 인구구조 변화’ 타령이다. 이 글로 미루어 볼  때,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김난도의 대표적인 저작들 역시 한국적 특수성에 대한 천착은 매우 부실하지 않을까 한다. 
 
단적으로 각종 '놀이'시리즈는 결코 세계적 보편성이 아니다. 한국에만 있거나 적어도 훨씬 심하다. 그런 점에서 김난도나 그 비판자들이나 교수들의 논문놀이와 정치인들의 정파놀이가 왜 횡행하는지? 그 무수한 비난, 조언에도 불구하고, 또 그렇게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왜 해소, 완화가 안 되는지를 집요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관료들의 규제놀이와 대기업의 갑질놀이도 마찬가지다. 선진국과 한국이 어떻게 다른지, 역대 수많은 해법들이 왜 별무신통이었는지 집요하게 캐물어 들어가면 한국 사회에 대한 이해가 훨씬 깊고 넓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사람이 너무 적은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것이 대한민국 청춘들의 아픔을 필요 이상으로 악화시키는 핵심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갑질 놀이의 뿌리
갑질은 재벌대기업(갑)과 협력업체(을)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을과 병, 병과 정 사이의 갑질이 훨씬 혹독하다. 뿐만 아니라 예산, 규제, 정책을 틀어쥔 공공(관료)에 의한 갑질도 만만치않다.규제놀이는 이것을 가리킨다. 대학재단의 갑질과 교수의 조교, 학생 등에 대한 갑질도 만만치않다. 코미디 소재가 된 소비자의 갑질은 애교 수준이다. 아무튼 갑질의 형태는 너무나 다양하며. 그 뿌리는 깊고 강고하다. 혹독한 기후(가뭄, 홍수, 추위, 더위)와 불안한 작황(기아) 그리고 정의나 공공과 담 쌓고 착취, 억압을 일삼던 권력층(관)과 상층(양반사대부 등)이 사회전반에 유포시킨 생존전략(단기주의, 이기주의)도 그 중의 하나 일 것이다.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먹고, 뽑아 낼 수 있을 때, 최대한 뽑아내고, 위세를 부릴 수 있을 때 최대한 위세를 부리는 문화 말이다.    
 
김교수가 언급한 대기업의 갑질놀이도 파고 들어가 보면, 삼성전자, 현대기아차 등, 엄청난 힘을 가진 연못의 고래를 방불케하는 글로벌 기업(그룹)의 존재를 빼 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이를 부조리라 할 수는 없다. 아니 우리의 자랑이다. 하지만 그 압도적인 힘의 차이 때문에 ‘공정거래의 신’이 고래기업을 경영 해도 갑질을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은 이 고래들의 협력업체가 되지 못해 안달이다. 갑질의 근원 중의 하나인 원하청 간의 현격한 교섭력 격차도 선진국에서 자본, 기술, 설비, 부품 들여다가 선택집중 전략에 의해 몇 개의 수출대기업(글로벌 플레이어)을 육성한 성공한 산업화 전략이 있다. 을, 병, 정으로 불리는 협력업체는 독일 일본의 오랜 역사와 기술을 자랑하는 강소기업이 아니다. 원청 대기업이 육성하다시피 했다. 독점적, 독보적 기술력이 없기에 교섭력 격차가 클 수 밖에 없다.  
 
물론 갑질과 관련하여 독과점 방지(경쟁 정책), 공정거래 감독, 소비자 보호 문제도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정책들이 왜 실효성이 없었는지를 캐물으면, 집권 세력의 정책 의지 부족과 실력(부실한 디테일)부족, 실무 부서(공정위)의 포획, 법원의 문제(전관예우와 포획 등), 기업의 생리를 꿰뚫고 있는 진짜 전문가를 영입하기 힘든 공직 임용제도 문제 등이 수두룩 나온다. 이 하나하나를 붙들고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면 또 여러 개의 부조리가 나온다. 왜? 왜? 왜? 하면서 파 들어가 보면 수많은 부조리들이 만수산드렁칡처럼,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얽히고 설켜 있다.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현상인지, 무엇이 몸통이고 무엇이 깃털인지, 무엇이 상류(뿌리)고, 무엇이 하류(파생 부조리)인지 헷갈린다. 
 
10%가 50%를 차지하는 구조
대한민국 청춘의 고통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 보면, 20세 이상 인구의 10%(400만명)가 소득의 50% 가량을 차지하는 1차 분배구조(세금과 사적 이전을 통한 2차 분배 제외)가 나온다. 2010년 국세청 통계를 가지고 분위별 시장소득(근로소득+사업소득+금융소득+임대소득 등, 공사적 이전 소득은 제외)을 추정한 김낙년 교수에 따르면 20세 이상 인구의 상위 10%(10분위, 379만7천명)의 경계 소득은 연 44,326천원, 평균소득은 80,851천원이며,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총 소득의 48.05%다. 그 아래 10%(9분위, 379만7천명)의 경계 소득은 26,264천원, 평균은 34,056천원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총 소득의 20.24%다. 이 통계에서 놀라는 것은 10%의 경계 소득이 연 4500만원(그것도 근로소득, 금융소득 다 합쳐서)도 안된다는 것이고(따라서 대기업 화이트칼라, 블로칼라, 공무원, 교사 등이 다 포함된다), 다른 하나는 그 비중이 48.05%로 세계 최고라는 것이다.  
 
이 10%(지금은 대략 400만명) 안에 어떤 사람들이 주로 들어가 있는지, 이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소득을 획득하고, 어떤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는지, 이들의 욕망의 수준(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수준)과 자본의 전횡이나 상실(구조조정)의 공포 등을 살펴보면 한국 사회의 치명적 부조리의 본질과 구조를 알 수 있다. 물론 국제비교와 역사적 추이 분석은 필수다. 
 
사실 상위 1%나 10%의 소득 비중 확대(집중)은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어떤 사람은 대한민국의 부조리를 세계적 보편성의 관점에서 설명하며 어쩔 수 없다는 얘기를 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넘길 일이 아니다. OECD최악의 분배구조를 가진 미국을 보면 2010년 기준 상위 1%가 총 소득(1차 분배)의 19%를, 상위 10%가 48%를 차지했다. 이것이 1% 대 99% 대립을 강조하는 월가점령 시위의 배경이다.
 
그런데 한국은 2010년 현재, 상위 1%가 12.97%, 상위 10%가 48.05%를 가져간다. 누락이 심한 부동산 임대소득 하나만 감안해도 50%를 넘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객관적 위치도 모르고, 임금, 연금 올리거나 사수하자고 하는 공무원, 교수, 노조, 진보 등의 사고 방식-양극화과 일자리 3불(부족, 불만, 불안)에 상당한 책임이 있으면서도, 오직 재벌, 부자, 신자유주의를 향해서 손가락질을 해 댄다--으로 유추해도 5년이 흐른 지금은 10%가 50%를 확실히 넘겼을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차이
문제는 또 있다. 미국의 1%에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당대에 세계적 기업을 일군 스티브잡스, 주크버크, 워렌버핏 같은 사람들이 주요하게 포함 되어 있다면, 한국의 1%에는 일감 몰아주기나 변칙 상속으로 악명을 떨친 재벌과 부동산 부자의 2세, 3세들이 주요하게 포함되어 있다. 또한 치열한 글로벌 경쟁을 뚫러낸 일부 대기업, 중견기업 종사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공무원, 공기업, 독과점 기업과 규제산업(은행, 방송, 통신, 국방, 농협 등) 종사자들이다. 한국의 노조원의 대부분은 바로 여기, 10%에 속하며, 임금의 산업 및 사회적 표준(공정가격) 개념 자체가 없다. 임금은 지불 능력의 함수로 여긴다. 좋은 회사 들어가면 높고, 나쁜 회사 들어가면 낫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기여에 상응하는 처우, 한마디로 직무의 사회적 가격 개념이 없다. 그러므로 기본 철학 자체가 슈퍼갑(공공부문)과 갑(대기업, 독과점 기업)의 노사 담합에 의한 을, 병, 정 노사와 후세대에 대한 약탈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한국 노조 조직률이 낮고 이것이 무슨 양극화의 주요한 원인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현실을 너무 모르는 사람이다. 갑질 내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약탈 사상을 내면화 하고 있는 한 노조 조직률은 절대로 높아질 수가 없다. 사실 1989년 거의 20%에 육박했던 노조 조직률이 10%미만으로 떨어진 것은 중소기업 자체의 몰락과 관련이 있다. 한국이 선진국과 현저하게 다른 것은 거의 모든 힘센 존재들이 노조 비슷한 조직을 갖고 있고, 무엇보다도 노조와 대동소이한 마인드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공무원, 교수, 변호사, 의사 등이 그렇다. 개인으로서는 희생과 봉사 정신에 투철해도 집단은 노조와 다를바 없다.
 
그러므로 상위 10%~20%와 나머지 90%~80%의 소득 격차는 거대한 절벽을 연상시킬 정도로 크다. 이 낙차로 인해 쌍용차나 한진중공업처럼, 구조조정으로 인해 10%나 20% 집단에서 떨려나온 사람들의 고통이 너무나 크다.  ‘해고는 살인이다’는 단말마의 배경이다. 
 
인구 구조 급감의 뿌리
상위 10%~20%로의 소득 집중은 대한민국의 수많은 부조리의 중간 귀착점이자, 수많은 부조리의 원류이다. 여기서 흘러나온 최고 최대의 부조리가 바로 급감하는 인구구조다. 2013년 3월 현재 40~44세(5세 계급) 460만 명, 20~24세 340만 명, 0~4세 230만 명 말이다. 황당한 인구구조가 황당한 소득구조의 파생물이라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상상해 보라. 10% 400만명이 고임금, 고복지, 장시간 노동, 안정된 고용 등으로 50%를 잡수시고, 나머지 50%를 2400만명~2800만명이 아귀다툼 하는 장면을!! (취업자 통계에 잡힌 2400~2500만명만이 일자리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더 얄궂은 것은 이 10%의 임금과 고용(정년보장)을 표준=정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공무원, 교수, 노조, 자칭 진보정당 등의 이념질 내지 혹세무민질의 성과다. 그러니 나머지의 박탈감, 상실감이 오죽 하겠는가? 해고가 살인으로 되는 사회에서 신규 채용이 제대로 일어나겠나? 신규고용 창출을 수반하는 국내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겠나? 정상적인(?) 일자리가 만들어질래야 만들어질 수 없는 체제인데, 어떻게 결혼하고 애 낳나? 노량진에서 몇 년 이고, 아니 10년이라도 고시 공부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 아닌가? 자신의 사회적 기여 보다 처우가 월등히 좋은 곳(공공부문, 독과점 기업, 규제산업 등)들어가기만 하면 ‘해고는 살인이다’ 면서 결사적으로 싸우고, 행여 해고라도 되면, 기업이 살아있기만 하면 5년이고 6년이고 투쟁하여 복직만 하면, 중소기업에서 10년 근무하는 것 보다는 남는 장사인데, 복직 투쟁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 아닌가? 냉정하게 보면 지금 한국에서는 9급 공무원 되는 것, 현대기아차 노조원이 되는 것이 일류대 로스쿨 나와 변호사 하는 것 보다 훨씬 낫다. 지방대 교수하는 것 보다 훨씬 낫다. 이는 역으로 투입(교육) 비용이 많고, 노동시장에 늦게 진입하는 변호사, 교수, 고급 공무원 등의 기대, 요구 수준을 엄청나게 끌어 올린다. 이것이 상위 10%의 소득 점유율을 끌어올리기 마련. 이런 식으로 힘센 집단의 약탈(지대추구)이 만연한 사회에서 어떻게 신뢰가 쌓일 수 있겠는가? 頂上 아닌 正常을 향한 몸부림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 지금 대한민국은 좋은 일자리는 안 만들어 질 수 밖에 없고, 공공부문 선호도는 점점 높아질 수 밖에 없고, 애들은 안 태어날 수 밖에 없고, 사회는 불공평과 불평등의 피눈물로 넘쳐날 수 밖에 없고, 정치 불신도 들끓을 수밖에 없다. 이러니 2006년 탈북했다가 2012년 북으로 돌아간 박인숙씨가 평양 인민문화궁전 기자회견장에서 "실업자가 넘치고 사회악이 판치며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가 바로 남조선이다. 인간의 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는 불만을 토로하지 않겠는가?
 
아파트 안에 들어온 푸세식 변소
미국 보다 양적으로 더 나쁘고, 질적으로 훨씬 더 나쁜 소득 분배구조는  수많은 부조리의 중간 귀착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위에는 어떤 부조리가 있을까? 현실을 피상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외환위기와 함께 밀려온 신자유주의를 지목한다. 재벌과 부자는 단골 원흉이다. 그런데 각종 통계를 살펴보면 한국의 소득분배 구조 악화는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다. 이 싯점을 전후한 시기에 일어난 정치경제적 사건이 무엇인가? 중국이 세계경제 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시기이다. 엄청난 자본을 빨아들이고, 엄청난 저가 상품을 쏟아냈다. 중국과 경쟁하기 위해, 중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한국 중소기업이 생산기지를 중국과 동남아로 그 얼마나 옮겼던가!! 게다가 1987년 7~9월 투쟁으로 본격화된 노조운동의 산업과고용에 대한 파괴적 영향력도 나타날 싯점이다. 8% 단일 관세율 같은 무식한 정책도 기업을 중국으로 내 쫒는데 크게 일조 하였다. 1990년대 중후반에는 외환위기도 있었고, 인터넷 등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유통혁명도 있었다. 이후에는 고속 교통망까지 가세하여 소비와 소득의 쏠림을 가속화 하였다. 이 외에도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부조리의 구조를 파악하고 해법을 마련하는 일은 경험과 전공의 한계, 수입 이념의 굴레, 이권(이익)의 사나운 저항이 수반되는 어려운 일이다. 아는만큼 보이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분명한 것은 부조리의 원흉으로 지목된 요인 중에는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것도 있고, 단지 적응할 것도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급변한 환경 적응 실패 내지 잘못된 대응(노조운동, 8% 단일 관세율, 외환위기 등)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치명적인 위기, 부조리에 대한 개념 규정(이름 붙이기)부터가 만만치 않은 일인데—김교수는 이를 재치있게 “놀이”시리즈로 표현했다--나는 이를 양극화(크고도 불합리한 격차), 일자리3불, 저출산, 저성장, 혹독한 경쟁과 갈등, 불합리한 유인체계, 지독한 정치사회적 불신 등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이는 한 두 개의 핵심 부조리라는 몸통에서 삐져 나온 머리만 다른 괴물들이다. 아파트 안에 들어선 푸세식 변소라는 몸통에서 기어 나온 냄새와 구더기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괴물의 몸통 내지 아파트 안의 푸세식 변소는 기능부전 상태의 공공시스템이고 그 중심에는 국가(관료)가 있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시대의 푸세식 변소를 재벌이나 자본의 전횡으로 간주한다. 정치시스템도 대통령과 유력정치인과 양대 정당 정도로 본다. 하지만 정치시스템에는 저질 담론 생산자, 증오와 분노를 발산하며 진영 논리에 사로잡힌 열성 응원단들, 양당의 독과점과 적대적 상호의존을 초래하는 선거제도도 포함된다. 책임이 결코 작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덩어리 집단이 없어서 모래알 같은 (조선, 한국)사회를 틀어쥐고 있는, 유일한 덩어리 집단이 국가(관료)이다. 그런데 이들을 지휘, 통제할 정치(시스템)가 공공적이도 않고, 실력도, 권위도 없으니 사회 전체가 각종 이익집단의 각축장이 될 수밖에......정당도 관료도 재벌도 노조도 언론사도 대학도 교수도 각종 직능집단도 자신의 기득권의 확대, 강화에 여념이 없긴 마찬가지다.
 
정치시스템의 포괄적인 영향력 아래에는 직업관료가 운영하는 정부(중앙정부-지방정부, 사법)가 있다. 이들은 많은 공공기관(공기업)을 거느리고, 교육시스템, 금융시스템, 연대(노조/농협/협회 등)시스템, 보건의료 시스템, 국방시스템, 그 외 건설/부동산,방송, 통신, 에너지, R&D 시스템 등을 운용한다. 예산과 규제도 운용한다.
 
정치시스템의 포괄적인 영향력 아래 거대한 정부와 예산과 규제가 있다는 것은 전세계 민주국가에 공통된 현상이다. 정치인과 정당이 권좌를 둘러싸고 격렬한 싸움을 벌이는 것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왜 한국의 공공시스템, 특히 정치시스템을 부조리의 핵심 원흉으로 지목하는가? 
 
조선, 식민, 전쟁, 분단, 발전국가의 유산
그것은 한국의 공공시스템이 유별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조선(유교 예치국가)과 식민의 유산, 전쟁, 분단의 유산(전시체제)과 성공한 발전국가의 유산이 그득하기 때문이다. 
 
그 유산의 핵심은 가치/자원(인사, 예산, 규제, 처벌)과 그 통제(중추) 기능이 관료=국가에, 상층에, 중앙에, 서울에 집중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통제/규제/처벌의 손길 내지 문어발이 어떤 나라 보다 촘촘하게, 강력하게, 다방면으로 뻗어 있다. 국가를 제외하고는 덩어리 집단 자체가 별로 없기에 상대적으로 더 강한 측면이 있다.최근 들어서는 대중정당, 재벌, 노조, 교회, 언론사, 직능협회 등이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한편 국토 크기가 작아서인지, 한반도를 풍미했던 정치집단은 자신의 가치를 권력—강제성, 일률성을 가진 법령--을 통해 한반도 전역에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유교이상 국가주의(조선 양반사대부), 식민통치(황국신민화), 공산주의, 반공(민주)주의, 주체사상은 물론이고, 최근의 진보주의 조차도 중앙에 집중된 권력을 해체, 재구성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를 쥐고 권력=법령의 힘으로 자신들의 가치/이상인 노동권 강화, 여권 강화, 최저임금 대폭 인상 등을 관철시키려고 해 왔다. 재벌 문어발 보다 양적, 질적으로 훨씬 강하고 크고 촘촘한 관/국가/공공 문어발들을 스스로 끊어내어, 할 일과 안 할 일을 분별하고, 권한(자유)과 책임의 균형이 잡힌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처지 조건이 천차만별인 5천만명이 사는 국가에서, 권력 내지 중추기능이 국가(관)에, 중앙에, 상층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는 것 자체도 심각한 문제인데, 더 심각한 것은 고도로 집중된 공공시스템을 지휘, 통제하는 정치시스템이 결코 유능할 수도, 공공적일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되면 관료주의적 편향이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정치는 염불(소명) 보다 젯밥만 밝히는 먹튀 정치, 도적 정치로 달려간다.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은 전쟁을 방불케 하지만, 삶의 고통을 경감하는 영향력(결과)은 스포츠와 비슷하다.
 
단적으로 지금 시스템에서는 기득권을 약간이라도 내 놓는 집단(공무원 등)은 무조건 야당과 손을 잡게 되어 있다. 선거 승패가 미소한 표차로 갈리는 구도에서는, 야당과 기득권을 내놓는 집단이 손을 잡으면 정부여당의 어떤 개혁 시도도 막아내든지, 아니면 개혁 호랑이를 고양이로 만들수 있다. 그래서 지금의 정치시스템과 공공시스템을 그대로 두면 세종대왕과 이순신과 정약용을 합쳐 놓은 듯한 인물이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어도 별무신통일 것이다. 그런 인물이 자라기도 힘들고, 공직에 진출하기도 힘들지만......
 
이는 정치시스템, 교육시스템, 금융시스템, 보건의료시스템, 지방자치시스템 , 농협시스템 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규제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운영되는지, 예산이 어떻게 할당되고, 그 효과성이 평가, 피드백 되는지 등을 천착한 결과다.(농협 관련해서는http://news.donga.com/List/ColumnDA/3/040106/20150207/69523229/1)
 
공공, 특히 정치가 부실하면 사회시스템 설계 능력이 떨어진다. 시스템을 설계한다는 것은 적정한 진입(자격) 장벽을 설치하고, 예산을 할당하고, 지배구조(권한과 책임), 감시통제 장치, 상과 벌(평가보상체계), 권리의무 체계 등을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스템 작동 환경, 제도, 사람(리더십, 이해관계자)의 특성(욕망, 공포, 정서, 문화) 등을 두루 살펴야 한다. 선공후사의 철학, 전체적 시각(5천만명의 밥그릇 등), 적절한 타협 등이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에서 시스템 설계, 운영의 책임을 맡은 정치인과 공무원은 전체를 아우르는 시각이 매우 취약하다. 그래서 주요 공공시스템은 소수의 꼼수, 공포, 사적 욕망으로 점철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교육시스템과 정치시스템과 농협시스템이다. 교육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가르칠 지를 법령으로 규정해 놓았다.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떠벌이며, 뗄려야 뗄 수 없는 교육자치를 지방자치에서 떼어 놓았다.(교육 관련해서는 http://news.donga.com/3/04/20131029/58525750/1)
 
관료에게 어부지리를!
한국 사회의 부조리의 대부분은 알라딘의 마술램프에 사는 거인(요정) 같은 존재인--잘 되게는 못해도 안되게는 할 수 있다—관/국가/공공을 컨트롤 하는 정치(시스템)의 부실에서 온다. 정치(선거,정당)제도는 권력 교체는 가능할런지 모르지만, 정치가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기는 힘들도록 만들어져 있다. 정치생태계도 피폐하다. 담론(비전,정책, 이념)생산 유통 시스템도 부실하다. 내가 줄기차게 한국 사회를 알아야 한다고 부르짖는 이유다.
 
정치시스템 만이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공심 자체가 취약하다. 공심은 본래 나만 잘 살자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잘 살자는 것이다. 선공후사 마인드, 공평 감각(각자의 합당한 몫), 5천만명의 밥그릇을 두루 살피는 넓은 시야가 기본이다. 그런데 한국은 혹독한 역사와 기후 탓인지, 위기시에 위정자들의 야비한 행태를 자주 봐서인지 시야는 협소하고, 호흡은 짧다. 그만큼 상대에 대한 불신은 강하다. 챙길 수 있을 때 최대한 챙기려 한다.  이것이 착취놀이와 규제놀이의 뿌리다.
 
논문놀이는 놀고 먹는 교수들을 제어 한다는 발상과 평가의 주관성, 다원성에 대한 불신과  이공계 교수와 (그 지역 특유의 문제를 연구하는) 인문사회계 교수를 구분하지 않는 거칠기 짝이 없는 인센티브 체계의 산물이다.
 
아무튼 공공의 이름으로 엄청나게 많은 것을 틀어쥐고 있는데 이를 컨트롤 하는 정치 및 관의 공심, 사상, 문화, 제도, 실력은 너무 후지니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리가 있겠는가?
 
한편 부와 권력의 집중으로 인해 사회적 불신과 불만, 짜증과 분노는 항시 들끓으니, 정치판은 역동적이 되고,따라서 승패는 예측 불허가 된다. 열성 응원단의 '저 놈들 죽여라!' 는 분노, 증오까지 가세하니 정치는 흥미진진한 격투기 스포츠처럼 되어 국민의 관심을 엉뚱한데로 빨아간다. 결과적으로 진보와 보수는 서로 물고 물리며 싸우다가 관료에게 어부지리를 선사하는 도요새와 조개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로 인해 사회 전반에 관료적 편향이 더 강해진다. 한국 관료 집단은 (예산, 규제, 처벌, 폭력(군대) 등 진짜 권력을 휘두르기에 엄격한 책임성/윤리성, 높은 보수, 신분보장이 필요한) 판검사, 군장교, 고위 관료와 얼마든지 신축자재하게 운용해도 되는  공공서비스(교사, 복지사, 사무직 등) 인원이 뒤섞여 있다. 그런데 이들이 급수, 호봉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9급 공무원 자리가, 민간대기업이나 심지어 변호사 보다 훨씬 좋은 자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욕할 놈은 직업 관료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치다.
 
이렇듯 한국 특유의 관/국가/공공을 천착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는 온통 부조리의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게 된다. 선진국 좌파나 우파 이론의 앵무새가 된다. 복지 결핍, 도덕성/진보성 결핍(시장/자유/경쟁 과잉 등), 정권의 결핍(정권을 못 잡아서)에서 문제를 찾는다. 재벌 타령, 부자타령, 자본 타령, 규제완화(신자유주의) 타령을 일삼으며, 도덕성, 이타심, 규제강화를 강조하는 쪽으로 달려간다. 물론 김교수는 이런 얕은 좌파 류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우측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았다.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 시대의 절체절명의 과제를 받아 안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좌파 정책 패러다임도 우파 정책 패러다임도 자칭 중도 역시 세계적 보편성과 한국적 특수성 문제를 제대로 천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적 교착은 우리가 풀어야하다.
 요컨대 청년들의 아픔과 각종 ‘놀이’들의 원인과 해법을 알려면, 관=국가가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해외(세계화, 지식정보화, 민주화, 기후변화, 에너지자원 위기, 중국의 부상 등)로부터 오는 강력한 힘이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 지를 직시해야 한다. 이것을 바로 보면 극단적인 것이 유달리 많은 한국 관련 oecd 경제사회 지표들의 비밀도 알 수 있다. "이 나라가 난국을 타개할 변화의 역량을 상실해가고 있는" 진정한 이유도 알게 되고, 김난도의 축사가 왜 돌아서면 남는 것이 없는지도 알게 된다. 
 
 김교수의 축사에서 내가 가장 깊이 공감한 것은 지금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교착상태라는 진단이다.  이건 적확한 진단이다. 그런데 김교수는 이유를 얘기 하지 않았다. 아마 모를 것이다. 신입생들에게 이를 풀어낼 리더십을 주문했다. 그런데 이들이 중견적 역할을 할 때까지, 이 치명적 교착 상태를 못 풀면, 대한민국은 망해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교착 상태를 푸는 리더십은 신입생에게 주문할 것이 아니라, 김교수와 나를 포함한 우리 세대가 목숨걸고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신입생이 자라 에베레스트산 같은 리더십이 되려면, 우리 세대가 피와 땀과 눈물과 경륜으로 히말라야산맥을 만들어줘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 첫걸음은 세계와 한국을 제대로 통찰한 경세비전과 이를 구현할 정치결사다. 두번째 걸음은 정치에서 생산적 경쟁을 가능하게 하는 선거제도다. 중앙선관위가 제안한 수준이나마 관철하는 것이다.–끝-
 
-----------길게 비판은 했지만 여전히 훌륭한 축사니 한번 읽어 보시길-------------
김난도 교수 서울대 입학 축사 전문(한국일보)
http://hankookilbo.com/m/v/007e0174c86e48f8a95db4dffaddb695
기사등록 : 2015.03.02 17:41
안녕하십니까, 저는 생활과학대학 소비자아동학부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김난도입니다.
평교수인 제가 이렇게 귀한 자리에서 축사를 할 수 있게 되어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기회를 주신 총장님과 선배 교수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1963년 3월 2일에 태어났습니다. 3월 2일요. 그렇습니다. 오늘이 제 생일입니다.
어릴 때는 내 생일이 싫었습니다. 학년이 새로 시작되는 날이라 제대로 생일잔치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늘이 제일 좋습니다. 1년 365일 중에 아무 날이나 생일로 고를 수 있다고 한다면 이제는 주저하지 않고 오늘 3월 2일을 고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선생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일 아침에 전국의 학생들이 모여 일제히 새 학년을 시작한다는데, 선생에게 그보다 더 어울리는 생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사주팔자 같은 것은 믿지 않지만, 그래도 생일만큼은 선생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직업이 천직이라고 여길 수 있으니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을 가르치게 될 선생으로서 축하와 당부의 말씀을 함께 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53번의 생일 중에서 제가 제일 행복했던 날은 1982년의 오늘이었습니다. 서울대학교에 합격해 입학식을 치르는 날이었습니다. 그때는 저 아래 대운동장에서 입학식을 했는데 날씨가 아주 추웠습니다. 바람은 눈물이 나도록 차가웠지만, 가슴은 터질 것처럼 뜨거웠습니다. 나보다 더 흥분하신 어머니의 표정을 보며 평생 처음 효도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것만으로도 기뻤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잠시 후 입학식이 끝나거든 뒤에 앉아 계신 어머니, 아버지에게 꼭 진심을 담아 감사하다고 말씀드리십시오. 앞으로 기회가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꼭 하십시오.
사실 저희 동기들의 대학생활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나라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잠시 희망을 가졌던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가 군홧발로 처참하게 짓밟혔습니다. 참담한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뜬 대학생들에게 자기 자신의 미래를 꿈꾸는 것은 사치 정도가 아니라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순전한 무사유의 범죄였습니다.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엄혹하고 처절한 시기를 저희는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대가 지금보다 더 행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회는 많았기 때문입니다. 졸업을 하면 어디든 일자리를 골라서 갈 수 있었습니다. 어떤 영역이든 조금만 진지하게 계속하면 나름 전문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 세대가 더 총명하거나 열심히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대의 행운이었습니다. 1960년대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가 되지 않던 대한민국이 지금 3만 달러에 육박하기까지, 단군 이래 가장 높은 성장을 누리는 30년 동안 우리는 청춘을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젊은 세대가 힘들다고 합니다. 좋은 데 취직하는 것이 어렵고, 제때 결혼하는 것이 어렵고, 제대로 된 방 한 칸 마련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유사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가졌다고 하는 이 세대가 말이지요. 물론 이것은 시대적 변화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을 누릴 수 없게 됐습니다. 성장의 시대에서 침체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경제와 인구의 구조가 변화하면서 그 많았던 기회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좌절하게 하는 것은 단지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고 실업률이 올라간다는 점 때문만은 아닙니다. 경기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었지만 전 국민이 금반지를 꺼내모으며 재기를 꿈꿨던 때도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를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기침체가 영구히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서, 이 나라가 난국을 타개할 변화의 역량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절망이 정녕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얼마 전 인기 있었던 웹툰드라마 미생에 ‘사업놀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진짜로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고 그저 열심히 하는 흉내만 내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드라마에서뿐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은 나라의 분열을 걱정한다면서 실은 자기 재선을 위해 국민을 이념으로 지역으로 갈라놓고 갈등을 이용하는‘정파놀이’를, 관료들은 공익을 도모한다면서 실은 자기 예산과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해 나라의 시스템을 비효율로 몰아넣는‘규제놀이’를, 대기업은 국가경제에 이바지한다면서 단가 후려치기, 사람•기술 빼앗기 등 각종 불공정한 관행으로 시장을 황폐화시키는‘갑질놀이’를, 일부 고용주들은 취업난을 악용해‘열정페이’다 뭐다 해서 청년 구직자의 노동을 약탈하는 ‘착취놀이’를, 저를 비롯한 교수들은 이러한 현실적 문제를 수수방관하며 자기 연구실적만 채우는‘논문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이 교착상태를 풀어낼 리더십은 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신입생 여러분,
좋은 날에 답답한 얘기를 꺼내 미안합니다. 저는 오늘의 축사를 준비하면서 새로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여러분에게 어떤 아름다운 축원을 해줘야 할까 많이 고민했습니다. 긴 고민 끝에 저는 듣기 좋은 덕담보다는 여러분이 앞으로 맞닥뜨려야 할 엄혹한 도전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분발을 당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이 소중한 기회를 막연한 인사말로 채우기에는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따끔한 각성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선생이 할 일이기도 하니까요.
지금 여러분이 헤쳐나가야 할 두 가지 도전과제가 있습니다. 나라 안의 도전과 나라 밖의 도전입니다.
먼저 나라 안의 사정을 살펴보면, 가장 걱정되는 것은 ‘세대이기주의’입니다. 영화 국제시장에 이런 대사가 있었습니다.“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게 참 다행이라고”요. 하지만 지금의 기성세대가 나중에 오늘을 뒤돌아볼 때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현재의 경제•고용•복지 등 담론의 줄기를 보면 나중에“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가 아니라 우리 자식이 겪게 해서 참 다행”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높은 자의 책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말은 어느 언론인의 표현을 빌리면‘세니오르 오블리주(senior oblige)’, 즉 나이 든 자의 책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젊은 자들은 나이 든 자들과 경쟁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기성세대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원과 정보와 인맥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에게 어느 정도 양보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단지 경쟁의 상대가 아니라, 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희망의 불씨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투자하고, 양보하고, 그들의 미숙함을 배려하지 않는 사회에 내일은 없습니다. 청년들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나라 밖의 도전은 더욱 심상치 않습니다. 작년 여름 저는 연구를 위해 일본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도쿄에 들를 때마다 혐한 시위대를 만났습니다. 지하철에 붙어 있는 잡지광고며 기사들의 상당 부분이 한국을 폄훼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일본은 다시 유치에 성공한 올림픽 준비에 들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또 지난 겨울에는 중국에 다녀왔습니다. 갈 때마다 놀랍도록 변하는 곳이지만, 어느새 우리보다 훌쩍 앞선 나라가 돼 있었습니다. 흔히 중국을 짝퉁의 나라 정도로 낮춰 보는 경향이 있는데,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중국은 압도적 1위의 외환보유국이고, 이미 우주정거장, 항공모함, 비행기, 고속철도를 자체 기술로 만들어내는 나라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중국이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고도성장을 계속해나갈 것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중국에서 가장 놀랍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 또래 젊은 세대의 열정입니다. 흔히‘쥬링허우’라고 부르는 중국의 90년대생들은 제2의 마윈, 제2의 레이쥔을 꿈꾸며 밤새워 도전의 열기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중국의 대학생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합니다.‘개미굴’이라는 10평 남짓한 아파트에 십여 명의 학생이 함께 기거하면서 해만 뜨면 도서관으로 뛰어나가 하루종일 공부하다가 돌아옵니다. 우리는 중국 인구의 1/27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중국에 뒤지지 않으려면 27배 정도 열심히 노력해야 할 텐데, 지금은 중국이 27배 더 노력하는 형국입니다.
우리를 침략해 식민지로 삼았던 나라에선 증오의 감정이 커지고 있고, 우리와 바다를 맞대고 있는 나라가 한순간에 세계 최강국으로 자라났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경험에서 배우고, 현명한 자는 역사에서 배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역사적 전환점을 맞고 있습니다.
결국 저는 여러분에게 희망을 겁니다.
단군 이래 최고의 역량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우리 젊은 세대가 교착상태에 빠진 나라에 새로운 모멘텀을 부여할 세계적인 인재로 성장해주기를 간곡히 바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주십시오. 제가 대학시절을 돌이켜 생각할 때 후회되는 일이 참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아쉬웠던 것은 역시 치열하게 공부하지 못한 것입니다. 스펙이 아니라 지성의 성장을 위해, 좋은 직업이 아니라 조국의 미래를 위해, 혼신을 다해 공부하십시요.
그러기 위해서 다시 공동체를 이야기할 때입니다. 나 자신만의 이익이 아니라 여러분이 함께 성장해 나가야 할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이타정신을, 여러분은 이 교정에서 배워나가기 바랍니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선함’을 가슴에 품고 개인의 열정을 불태울 수 있을 때, 인류와 나라와 학교와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성장이 서로 접점을 찾아 만개할 수 있습니다.
신입생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8848미터를 자랑하는 에베레스트 산입니다. 여기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제일 높겠습니까?
답은, 히말라야 산맥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이유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히말라야 산맥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레스트 산이 만약 바다 한가운데 혼자 있었다면 높아봐야 한라산이나 후지산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베레스트 산은 세계의 지붕이라는 티베트 고원의 거봉들과 어깨를 맞대고 있습니다. 그 준령에서 한 뼘만 더 높으면 바로 세계 최고의 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나라를, 우리 학교를 히말라야 산맥으로 함께 키워나갑시다. 바다 위에서 혼자 높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나와 함께 가야 할 사회적 약자들과 우리 공동체를 함께 생각하는, 선하고 책임 있는 인재로 성장해야 합니다. 당신이 여기 앉아 있기 위해 탈락시킨 누군가를 생각하십시오. 당신은 승리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채무자입니다. 선함과 책임감을 바탕으로 우리 공동체를 히말라야 산맥처럼 만들고 나서, 자신이 한 뼘만 더 성장할 수 있다면, 그때 당신은 바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학생들이여,
선해지십시오, 성장하십시오.
당신이 희망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