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방조제

고향 잃은 실향민의 애환 담은… 초겨울 바다와 이야기하며 걷다

아쿠오 2012. 11. 22.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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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21일 (수) 이연옥 기자 yorhee@iusm.co.kr
▲ 장생포초등학교 입구에서 바라본 장생포항.

마을 입구에 3개의 비(碑) 일행들 반겨
주민 떠난 자리엔 공장들만 덩그러니…

고래문화특구 지정된 장생포지역
공장 담벼락 귀신고래 생동감 넘쳐

수많은 공장 스쳐 지나 만난 고사천
무성하게 자란 갈대의 은빛물결 장관


해안길은 해안을 끼고 있는 길이라는 뜻을 어휘 속에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걷다보면 해안이 없는, 아니 애초에는 분명 해안길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인위적으로 형상을 잃어버린 해안(?)을 만나게 된다.

아홉 번째 해안길 걷기는 해안보다 메워지고 채워져 뭍이 돼 버린 해안에서 지금으로부터 몇 해 전까지 그 해안에서 생활했던 이들의 애환을 만나고 재생을 꿈꾸는 오래된 마을과 조우하는 일이었다.
개인적인 일 때문에 일행은 토요일 오후 1시 시청 광장에서 만나 여느 때처럼 양시천 대표의 차에 옮겨 타고 지난번 해안길 걷기를 마친 남구 매암동 양죽마을로 향했다.

▲ 양죽마을 입구에 세워진 서태일 시인의 시비.
마을의 흔적은 버스정류장의 안내표지판에만 어렴풋이 남아있는 마을 공터의 적당한 곳에 주차를 마친 일행이 몇 발자국 떼지 않았을 때 투박해서 오히려 더 정겨운 3개의 비(碑)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마을 변천사 등을 아로새긴 양죽부락 옛터비에는 누군가 마시다 둔 소주병만 댕그러니 남아있었다. 다듬지 않은 그대로 세워 오히려 친근하게 다가오는 비에는 세로로 내려쓴 ‘삼죽지향(三竹之鄕)’이라는 네 글자 아래 ‘선소에 화살대를 공납하니 버들대의 고향 楊竹이요 대는 사군자라 숨은 절개를 자랑함이니 대를 키움에 절개 또한 돋아나니 養竹이요 망석산 아래 포구나무터 양죽인의 숨결이 널리 묻어 선양될지니 揚竹이어라.’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 곁에는 양죽마을이 고향인 중견시인 서태일의 ‘그리운 고향 양죽’ 시비가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애환을 노래하고 있었다.
도로 가에 세워져 있는 이 비는 무심코 지나치기 십상이었다. 관심을 갖지 않으면 크게 눈에 띄지 않아 아쉬웠다.

시비 앞에서 잠시 옹기종기 모여살다 이제는 공업화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정든 고향을 떠난 이들을 떠올리는 사이 일행은 어느 새 저만치 앞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 용연삼거리에서 SKC 울산공장으로 향하는 일행.
곳곳이 패인 아스팔트와 다름없이 고르지 못한 흙길을 곡예하듯 걸으며 장생포로 향하는 일행의 왼쪽으로 울산해양항만청과 죽도, 현대미포조선 장생포공장이 해안을 차지하고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최근 이전한 울산항만공사 건물이 생뚱맞다 싶을 정도로 낯선 정경으로 우뚝 솟아있었다. 동화되지 못하는 어색함이 불편한 진실처럼 여겨지는 항만공사도 세월이 흐르면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워질 것을.

어느새 장생포에 발걸음이 다다랐다. 왼쪽으로 고래박물관과 고래연구소, 고래생태체험관을 지나 장생포고래특구로 지정되면서 간판을 일제히 정비해 질서정연하게 느껴지는 장생포에서 비릿한 바다 냄새를 들이켰다. 그 사이 김연숙 원장은 조그만 커피 전문점에서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을 사들고 나오고 나머지는 꾸준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름대로 정비를 한다고는 했지만 분위기 있는 커피전문점을 찾아볼 수 없는 안타까움은 감출 수 없었다.

▲ 장생포초등학교 교정으로 들어서는 길.
이곳을 지나면 한동안 바다를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한 일행은 바다 건너 태영인더스트리와 성신조선 등을 바라보며 때마침 항구로 들어오고 있는 인근 폐기물업체의 선박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철조망 사이로 선박이 움직이는 모양을 한동안 바라보다 다시 즐비하게 주차된 차량 사이를 지나 장생포초등학교를 거쳐 현대모비스 울산공장 앞으로 향했다. 1946년 개교해 한때는 어린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넘쳐났을 장생포초등학교는 올해 2월 거행한 67회 졸업식에서 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시 관내에서 가장 작은 학교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 현대모비스 울산공장 담에 그려진 귀신고래 벽화.
바다를 뒤로 하고 얼마를 걸었을까.
현대모비스 울산공장 담벼락에 귀신고래 한 마리가 눈을 크게 뜬 채 오가는 차량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벽화였다. 담쟁이넝쿨 등 푸른 잎 식물이 어우러져 생동감을 더하는 벽화는 도로 입구에 세워진 장생포고래문화특구 안내탑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잘 그려진 벽화에 하염없이 넋을 놓고 있을 수만 없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쌩쌩 달리는 차량을 마주 하며 언제 사람이 지나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가로에 심은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제 역할을 잃은 인도를 걷는 일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점점 해안길과는 멀어지는 도로를 따라 걷다보니 어디에서 흘러나오는지 모를 하수가 쓰레기 등으로 꽉 막힌 관을 타고 흘러내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걷지 않았으면 보이지 않았을 흉한 광경이었다.
소하천 오염원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묘한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효성 울산공장 정문을 지나 고사천을 끼고 걸음을 재촉했다.

▲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는 고사천.
고사천은 도심에서는 사라진 갈대가 키대로 자라 바람에 흩날리고 그 사이로 새들이 쉼없이 날아들고 있었다. SK에너지 울산콤플렉스와 효성 울산공장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고사천의 생태계가 건강하다는 것을 무성하게 자란 갈대며 다양한 풀들이 증명하고 있었다.

국가관리보안목표 가급 시설인 SK에너지 울산콤플렉스 등을 지나 어느새 발걸음은 처용로로 접어들어 있었다.
비릿한 바다내음과는 거리가 먼 차량 매연을 여과 없이 들이마시며 걷는 일은 아무래도 힘들었다.
오영애 부회장이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마스크를 꼭 준비하라고 했지만 실제 준비해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매연을 쉼없이 마셔야 하는 상황에서 때늦은 후회를 한들 소용이 없었다.

처용로에서 눈에 띄는 것은 가지라는 가지는 모두 싹둑 잘려 볼품없는 은행나무였다. 외국인투자기업단지 입구까지 줄지어 선 은행나무는 시가지 도로변의 가로수로 심은 은행나무가 잔뜩 매달린 열매가 무거운 듯 가지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것과는 딴판이었다.

▲ 어디에서 흘러나오는지 모를 공장폐수.
안쓰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용연삼거리로 향했다. 차량 규정속도가 60㎞인 이 도로를 오가는 차량은 규정속도가 무색할 정도로 쏜살같이 달리고 있었다. 교통사고 목격자를 찾는다는 현수막이 곳곳에 내걸린 것을 보면 사고가 얼마나 잦은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도로 양 옆으로 나무와 숲이 오아시스처럼 자라고 있어서 눈의 피로는 덜했지만 걷는 일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백사장이나 몽돌밭은 발걸음을 옮기기는 어려워도 피로감은 덜하지만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길을 걷는 일은 피로감이 배로 더했다.
길섶에 의연하게 피어있는 개망초를 한참 바라다본 일행은 더는 걸을 힘이 없어 SKC 울산공장 앞에서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현대미포조선 장생포공장, 현대모비스 울산공장, 한국엔지니어링 플라스틱, 효성 울산공장, SK에너지 울산콤플렉스 등 한나절을 걷는 사이 스쳐간 공장 간판을 하나하나 떠올려본다. 이어지는 해안길 걷기도 태영인더스트리와 동주산업 등 수많은 공장을 만나는 매력없는 일이 될 것을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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